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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와 임필대

강와 임필대
강와(剛窩) 임필대 (任必大)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내용

 

강와(剛窩) 임필대 (任必大)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강와선생문집> <오계서당>


 

‘귀산(龜山)에 서실(書室)이 있은 지는 오래 되었다. 찾아볼 만한 문헌이 없으므로 언제 지어졌고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옛 터는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옛날에 거문고를 연주하고 글을 익히던 지역이 사슴들이 풀을 뜯어먹는 곳으로 바뀌고 안개에 잠기고  ......(중략).....
정당에는 회보당(會輔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논어(論語)」의 ‘벗을 모으고 인을돕는다[以文會友以友輔仁]’라는 뜻에서 따왔다. 동재(東齋)에는 존성재(存省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정할 때엔 존양(存養)하고 동할 때엔 성찰(省察)한다[靜存動察]’는 뜻에서 따와서 학자들이 몸과 마음을 서로 기르는 공부로 삼도록 하였다. 서재(西齋)에는 홍밀재(洪密齋)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장재(張載)의 ‘문장은 세밀하게 살피고 마음은 넓게 놓아야 한다[文要密察心要洪放]’는 가르침에서 따왔다. 소당(小堂)에는 양정당(養正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주역(周易)」의 ‘어리 석을 적에 올바름으로 기른다[蒙以養正]’는 뜻에서 따왔다. 이 건물을 총칭하여 오계서당 (梧溪書堂)이라고 하였다.’... 
1744년(영조 20) 12월 모일에 쓴 금성면 구련리의 오계서당기(梧溪書堂記) 내용 중 일부이다. 여기에는 짧으나마 조문국과 관련한 내용들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이 기문을 쓴 임필대 (任必大:1709~1771)는 자는 중징(重徵), 호는 강와(剛窩), 본관은 서하(西河)이고 증조부는 세헌(世憲)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문장과 행의(行誼)로 당대 사람들에게서 존중받았다. 조부는 이원(爾元), 부친은 수국(壽國)이며 모친은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사인(士人) 이비(李柲)의 따님이다. 강와라는 호는 어릴 적부터 약한 선생의 기질을 극복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유약(幼弱)하나마 어려서부터 소학을 비롯한 경전을 읽었으며, 자라서는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퇴계집(退溪集)등의 성리서를 초록(抄錄)하며 연구하였다고 한다. 또한 과거를 보긴 했으나 별로 유념치 않았고, 사의계(四儀契)를 설립하는 등 문중과 향촌에 교화를 펼치는데 주력하였다. 1742년 부친을 잃고, 이어서 두 형이 전염병에 걸려 죽자 가문의 책임을 맡았으며 그 뒤 현령 이길보(李吉輔)의 간청으로 강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관찰사로 온 민백상(閔百祥), 조재호(趙載浩) 등의 예우를 받았으며, 여기에 여러 차례 향리의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강학에 전념하여 우곡(雨谷) 김낙행(金樂行), 청부(靑鳧) 권렴(權濂), 칠계(漆溪) 최흥원(崔興遠) 등 당시의 저명한 선비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였다.     

선생에게는 이보(伊輔)와 열보(說輔) 두 아들을 두었으며 사위는 권식(權湜)이다. 저술로 『봉선절목(奉先節目)』,『제의(祭儀)』,『문계약조(門契約條)』,『서당강규(書堂講規)』, 『문회약조(文會約條)』,『강와집(剛窩集)』『우율사칠설의의(牛栗四七說疑義)』등이 있다. 『강와집』의 구성에는 각 책 2권씩 책별로 목록이 있으며, 권두에 이광정(李光靖)의 서문이 있다. 권1에 부(賦) 1수, 시(詩) 60수가 있다. 3권에는 조선 순조 34년(1834년)에 서술한 유동도록(遊動都錄)이 있다. 기록에 경주 남산 삼릉 중턱에 자리잡은 상선암(上禪庵)에 올라보면 앞쪽의 하선암이 나무와 돌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산에는 하선암(下 禪庵)이라는 절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7에는 묘표(墓表) 6편, 묘지(墓誌) 3편, 행적(行蹟) 5편이 있다. 제문은 경내(境內)의 효자와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지은 것이 많고, 비지문(碑誌文)은 대부분 조선(祖先)의 선양을 위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선비들은 금강산과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유독 맑고 빼어나며 아름다운 곳으로 청량산(淸凉山)만한 것이 없다고 하며 청량산에 올라 경치를 보고 지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란 유산기(遊山記)를 많이 낳았다. 여기에 강와선생도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을 남겼는데 내용을 보면  

    
 

『小西踰一峴, 至溪上, 訪寒棲庵, 庵前有一間大門,  

扁之以退溪先生舊宅, 可敬亦可感也, 入門有堂六間, 當有先生手書,  

古井銘刻板, 又有道學淵源坊, 海東闕里山南考, 亭大字刻板,  

又入一小門見寒樓庵, 房一間, 堂一間, 繚以小垣,   

堂後雜植芍藥, (중략)

又有古硯匣, 硯則失之云, 軒外諸景, 滿在先生記中,  

猶宛然也, 仍投宿典敎堂  


 

.... 조금 서쪽에 가서 고개 하나를 넘어 계상에 가서 한서암(寒棲庵)을 찾았다. 그 곳 앞 한칸 대문에 걸어 놓은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라는 편액을 보니 공경스럽고 감동적이다. 문으로 들어가니 당(堂)은 여섯 칸인데 당에는 선생께서 손수 쓴 고정명(古井銘)이라는 각판이 있고, ‘도학연원(道學淵源)’ ‘해동궐리(海東闕里)’ ‘산남고정(山南考亭)’ 이라고 큰 글씨를 새겨 놓은 판자가 있다. 또 작은 문 안에 들어가 한서암을 보았다. 방은 한 칸이 고 당도 한칸이고 작은 담장을 둘렀고, 당 뒤에는 작약을 섞어 심어 놓았다.  ......(중략)...... 또한 옛날 퇴계선생께서 쓰신 벼룻집이 있는데 벼루는 잃어버렸다고 한다. 암서헌 밖의 여러 경치는 선생께서 지은 기문에 가득 실려 있어 비슷했다. 전교당에서 잤다.

1786년에는 빙계서원(氷溪書院)의 교석(敎席)을 주도하며 통강례(通講禮)를 행하고자 했던 귀미리의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의 문인이었던 강와선생의 묘역은 앞으로는 금성산이, 뒤로는 두 팔을 펼치듯 아늑한 곳 오동산(梧桐山) 남쪽 기슭 병향(丙向)의 언덕에 묻혔다.  

    

    

※ 찾아가는 길  

오계서당 : 의성군 금성면 조문로 67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