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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장한상

운암 장한상
『울릉도 사적기』를 남긴 운암(雲巖)장한상(張漢相)

내용

 

 울릉도 사적기를 남긴 운암雲巖 장한상張漢相 




 
<유물관>




장한상(張漢相: 1656~1724))의 관향은 순천(順天)이며 자는 필경(弼卿), 호는 운암(雲巖)으로 상주목(尙州牧) 내동면 사포리(현재 구천면 용사리 상제부락)에서 1656(효종 7) 106일 삼도수군 통어사를 지낸 장시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장덕명(張德明)이고 조부는 장익(張翊), 부친은 장시규(張是奎),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다.
선생의 탄생 이야기는 모친이 비안현 외서면(현 구천면 내산리)청석마을에서 잉태했으나 출산일을 짐작해 사주(四柱)를 보니 이곳에서 출산하면 큰 인물이 못 된다는 예언에 따라 구천면 용사리로 이주한 후에 낳았다고 한다.
그 후 출생한 선생은 3일 만에 앉았고, 석 달 만에 걸었다고 전해지며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고 눈의 광채가 빛나서 마치 선인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고 전한다.
선생이 혈기 왕성할 때, 산처럼 커다란 호랑이 여러 마리가 장안에 나타났는데, 그 중 호랑이 한마리가 선생 앞에 와서 엎드리자 선생은 바로 등에 탔고 이어서 5~6 마리의 호랑이가 그 뒤를 따랐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현재 호랑이를 탄 그의 화상이 선생의 사당에 보관되어 있다.

무관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운암은 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 선전관, 진위장군(振威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 내금위장(內禁衛將)과 칠곡(漆谷), 회령(會寧) 등지의 수령을 두루 거치고 1682년 통신사(通信士)로 일본에도 갔다. 그 뒤 삼척포진영장(三陟浦鎭營將)으로 기용되어 울릉도에 잇따른 왜구의 침범을 막았으며 이어 호남에 대기근이 들어 도적이 들끓자, 선생이 부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는데 이곳 주민들이 철비를 세워 송덕을 기렸다. 철비가 세워진 곳은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하여 7년간 머무르면서하멜 표류기를 쓴 곳이기도 한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이다.
병사장공한상영세불망비(兵使張公漢相永世不忘碑)라 쓰여진 비 좌우에는
天彰南鎭 飢病咸蘇 - 남쪽 진을 하늘에 드러내 굶주리고 병든 이 모두 살렸고
開典雄蕃 卓世之恩 - 병사의 소임을 법전대로 펼치니 세상에 끼친 은덕 우뚝하다.’
라 새겨져 있다.
 
1694(숙종 20) 삼척첨사이던 선생이 조정의 명령으로, 919일에 울릉도 순시를 나가 독도를 발견했다는 장한상 울릉도 사적기를 남겼다.
東望海中有一島 杳在辰方 而其大末滿蔚島三分之一不過三百餘里
- 울릉도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 가운데 섬이 하나 있다. 아득한 동남방에 위치하였으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에 못 미치고, 거리는 300여리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독도의 존재를 명확히 기술하고 있으며 사적기 사본은 현재 독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선생이 조사한 자료는 1693년 동래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를 침입한 일본인을 추방한 이후이지만 1697년 안용복의 활동으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 받고,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금지 공한을 시달하는 일련의 과정 이전에 조정에 전달된 문헌으로서 조정의 정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이 기록이야말로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문서로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이며 숙종 38(1712) 선생이 함경북도 병사(咸鏡北道 兵使)로 근무할 당시 왕명으로 백두산 남쪽지대 지형을 그려서 바치기도 하였다.
 
조선 숙종 대의 17세기에도 전 세계적으로 기상이변 현상이 일어난 소빙기가 있었다고 한다. 우박과 서리, 한발과 홍수, 해일·지진 등 지상 및 해상의 재앙이 닥쳤고 이에 따라 실농, 기근, 전염병, 충해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자연의 재난으로 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은 도적떼가 되거나 또는 세금이 없는 울릉도와 독도로 건너가 어로 활동을 하고 또 일부는 청나라 국경 지대로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울릉도 쟁계(鬱陵島爭界)가 일어났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백두산정계비가 서게 된 원인의 천재지변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울릉도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고 주민을 이주시켜 진을 설치해 일본의 침탈을 막자는 남구만의 견해를 받아들여 삼척영장인 선생을 파견하였던 것으로 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3호로 지정된 경덕사(景德祠) 소장 고문서 및 유물들은 장한상의 영정, 장시규와 장한상의 교지, 유지, 유서통, 실록, 호패 수우각, 단장(무관 지휘봉), 인장(숙종 하사품), 소초, 병학지남, 외손 소봉사, 산송(山訟)문서, 동복 분쟁 화해 문서, 일산 등이다. 2012년 에 의성 조문국 박물관에 일괄 위탁 보관하였다. 200 여점이 한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17~19세기 자료라는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견해다.
 
선생은 1724(경종 4) 갑진 219일 셋째사위 병조판서 이삼[李森]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백학산(白鶴山) 동쪽 비안면 외곡리에 있으며 경덕사(景德祠)에서는 매년 유림에서 부자를 삼월 中丁日에 함께 제향하고 있다.
 
 
 
 
찾아 가는 길
장한상 묘소: 의성군 비안면 외곡길 28-7
경덕사: 의성군 구천면 용사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