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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 신지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선 오봉 신지제(申之悌)
내용
국난극복의 선두에 선 오봉 신지제(申之悌)
<신지제 비와 낙선당> | <오봉종택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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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 구미 입향조 신지제(申之悌1562~1624)는 관향은 아주, 자가 순부(順夫) 호가 오봉(梧峰)·오재(梧齋)로 증조부는 증창례원 판결사 한(翰)이며, 할아버지는 증공조참판 응규(應奎), 아버지는 증좌승지 몽득(夢得), 어머니는 월성박씨(月城朴氏)로 민수(敏樹)의 딸, 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지(址)의 딸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으며 7세 무렵에 이웃 노인에게서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게 된다. 13세 소년 시절 때는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機)에게서 5년간 배운 뒤 의성현 지보사(持寶寺:현 군위군)에서 3년 동안 배웠다. 20세에 빙산사에서 공부하여 28세 때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후 내외 요직을 역임하였다. l601년에 정언(正言)과 예조좌랑을 이듬해에 지평(持平)·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성균관 직강(直講)을 역임하였다.
16l3년(광해군 5)에 창원부사로 나가 명화적(明火賊) 정대립(鄭大立) 등을 토벌하고 민심을 안정시킨 공로로 16l7년(광해군 9)에 공신교서를 내리고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이 교서의 형식은 일반 교서와 다를 바 없이「敎具銜姓名書 王若曰云云……故玆敎示想宜知悉 年號某年某月某日」이라고 하는 형식을 그대로 쓰고 있다. 즉「敎昌原府使申之悌明火作賊鄭大立等盡心跟捕賞加書」라 하고、왕약왈 운운이라 하여 정대립 등을 잡은 공로로 통정대부직(通政大夫職)을 내린다는 내용을 적고, 교서의 마지막에 연호와 연월일을 적은 다음 연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었다.
선생의 전적(典籍)·고문서(古文書) 8종 5책 78매는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345호로 지정되어 현재 한국국한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주요 목록으로는『영남동도회첩(嶺南同道會帖)』,『장사목록(長沙目錄)』,『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地圖)』,『재사종의(齋舍宗議)』,『구미보신장도목완의(龜尾洑新粧都目完議)』,『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疏)』,『오봉집(梧峰集)』 고문서로는 교첩지 등 49매, 유지 2매, 교서 1매, 시권 3매, 혼례간 2매, 녹패 3매, 준호구 22매 등이 있다.
여기에 구미구보신장도목완의(龜尾舊洑新粧都目都完議) 고서 내용을 보도록 한다. 구미구보(龜尾舊洑)는 오봉이 구미에 입향하여 세거하면서 마을의 몽리답(蒙利畓)에 물을 댈 수 있도록 길부촌(吉夫村) 앞에 축조한 보이다. 보의 관리는 아주신씨 문중에서 주관하고 매년 돌아가면서 도감(都監)하되 타성(他姓)은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는 입역(立役)이나 수세(水貰)가 전혀 없었으나 기유년 이후 신씨 종가에서 수세하게 되어 1두락 당 5량 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보 경작자들이 일제히 회합하여 구보 도목(都目)을 추심한 뒤 경술년 9월에 새로 조약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비록 신씨 후손들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여러 경작자들과 마찬가지로 입역과 수세를 내도록 한다는 완의이다.
이 완의(完議)는 전체 1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5.5㎝, 가로 28.5㎝, 재질은 저지(楮紙)이고 첫 장에 완의하는 목적을 기록하여 두고 이어 상·중·하고(上·中·下庫)로 구분하여 보 중의 작자와 경작 면적을 나열하였다. 서두에 답주(畓主)를 쓰고 다음 단에 몇 배미(夜味) 몇 두락지(斗落只)로 경작 면적을、마지막 단에는 경작자를 기록하였다.
구미보의 완성으로 이후 360여 년간 인근 7~8개 동의 농장에 관개할 수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국가 위기에 안동과 의성 지역의 의병 유가족 돕기와 직접 양육 등 원호 활동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는데, 구미보는 이 사업에도 큰 도움을 주어 개인 문중에서 보를 축조하는데 열의를 보였다는 점이 부각되는 부분이다.
선생은 인조반정 초인 1623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이듬해 63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안평면 중률 2리에 정부인(貞夫人) 함안조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묘갈문은 풍산(豊山) 김응조(金應祖)가 지었다.
1669년에 건립된 오봉사당(梧峰祠堂)에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으며 그를 경모하기 위한 경현사(景顯祠)가 창건되었고 이어 장대서원(藏待書院)으로 개칭하였으며 송은 김광수, 회당 신원록, 경정 이민성과 함께 제향, 금산서원(錦山)에도 신체인(申體仁)과 함께 제향되어 있다.
구미리에는 낙선당(樂善堂)과 신지제신도비(申之悌神道碑)、금산서원(錦山書院)、죽애정(竹厓亭)、감애정(鑑厓亭)、삼지당(三知堂)、창암정(蒼巖亭) 등 아주신씨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최근에 한국국학진흥원은 2019년 7월 경상북도의 영남선현문집번역사업비 지원을 받아 ‘오봉선생문집’ 두 책을 번역하여 발간했다.
오봉종택: 의성군 봉양면 구미길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