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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 박장춘

우천 박장춘
오래도록 우뚝 솟을 우천(愚泉) 박장춘(朴長春)

내용


오래도록 우뚝 솟을 우천(愚泉) 박장춘(朴長春)



 


   
 <유허비>                                                 <옥천사(옹천재)>                   
  

원근의 학자들과 벗하면서 성리학을 강론하고 후학에 힘쓴 박장춘(1523~1595)은 대대로 충효로 다져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남달리 천성이 지효하고 학문을 즐겨 일찍이 글을 쓰고 부지런히 익혔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원백(元伯), 호는 우천(愚泉). 사직(司直) 박유부(朴有阜)의 증손으로 조부는 참봉 박경신(朴景信)이고 아버지는 박등(朴登)이며 어머니는 김원호(金員琥)의 딸 월성 김씨(月城 金氏), 부인은 유습(柳隰)의 딸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우천은 조선 초기에 학문에 관통하였고 공훈은 사직을 보존한 明谷書院에 배향된 琴隱 朴成陽5세손으로 1523(중종18) 1013일 가음면 현리에서 태어났다. 성격이 온순하여 대인관계가 부드러웠고 사물을 대할 땐 혹 실수할까 성인같이 조심하고 천성이 도학자다운 면모가 있어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 1559년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맑은 샘이 흐르는 곳에 정자를 짓고 우천이란 당호를 문미(門楣:문 위에 가로로 댄 나무)에 걸어두고 날마다 서적을 읽으며 즐거워하였다고 한데서 선생의 호가 이에 연관해서 지은 것이라 본다.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에 뜻을 버리고 원근의 학자들과 성리학 강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4년 뒤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자 단지(斷指: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임)하여 허리띠를 풀지 않고 밤낮으로 정성껏 회춘을 축원하니 이를 본 이웃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전한다.
 
가음면과 춘산 지방 주민들의 곡창이라고 하는 평산 들의 추곡을 군위 의흥까지 싣고 가야 하는 불편과 고통을 덜어 주고자 1577년에는 자비와 의연금 일부를 모아 지금의 가음면 현리에 사창(社倉:조선시대 각 지방의 면에 둔 곡물 대여기관)을 세웠다. 이어 조정에 건의하여 창고를 세우게 되었기에 속칭() 마을이라 불렀다. 이를 본 주위 어른들의 칭송이 자자함은 물론 지금의 속명을 창리, 창마을이라 부르는 까닭도 선생이 세운 창고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일화를 소개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년임에도 장정보다 더한 기개와 눈물을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금은(琴隱)의 후예로서 창의(倡義)하여 죽음을 바치지 않는다면 후일 죽어서 무슨 낯으로 조상들을 뵐 수 있겠는가?”
라며 아들 무선을 팔공산 권응수 의진(義陳)에 보내어 경주 의장 김응택(金應澤)과 의성 수성장 권희순(權希舜), 자인 의병장 최문병 등 충용인사(忠勇人士) 여러 명과 전략을 꾸미는 등 나라를 지키는 밑거름이 되게 한 를 함께 보여준 본보기가 되었다그 뒤 몇 년간 병화로 인해 굶어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자 선생은 자비를 털어 죽을 끓여 많은 백성을 온전하게 구휼하였다.
 
선생은 판서와 감사를 지낸 달촌 윤국형(尹國馨)과 산운마을 영천이씨 입향조인 학동 이광준과는 20세 때부터 친밀하게 지낸 처지고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길 바랐으나 응하지 않다가 39세 때 진사시에 차석을 하고는 평생 학문과 낙도(樂道)하며 군자답게 지냈다.
 
현재 국가 사적 제555호 조문국사적지와 조문국박물관에는 만사 김진종(晩沙 金振鍾)의 차조문경덕왕릉수비운(次召文景德王陵竪碑韻)과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과조문유감(過召文有感)이란 시를 석각해 두었다.
이에 선생의 저서愚泉實記에도 조문국에 대한 시가 전하는 바
 
千百年光一瞬間 천백년 오랜 세월도 일순간이런가
舊邦遺跡但靑山 옛 나라 끼친 자취 청산만 우뚝하네
泥農御井馳黃犢 진흙 짙은 우물가엔 누렁소가 치달리고
草沒金城起翠髮 풀에 잠긴 금성터엔 초록머리 오가누나
累累陵園皆剝落 얽매였던 능원 터는 거의 다 퇴락했고
崔崔石塔尙堅頑 우뚝 솟은 석탑만이 오히려 견고하네
興亡物理無前定 흥망의 사물이치 미리 정함 없느니라
獨自悼傷去復還 나 홀로 슬퍼하며 오고 가고 하는구나......
라고 당시 조문국의 고분 일대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선생은 73세에 춘산면 금천리에 묻혔으며, 1609년 효자로 천거되어 정려를 받아삼강록(三綱錄)에 효행이 실려 있다. 사림의 공의(公議)로 옥천사(玉川祠)를 세워 재향되어 오다가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1925년에 함양박씨 경와공파 문중의 후손인 박재구, 박재환 등이 옹천단 위치에 옹천재(瓮泉齋)를 다시 지으면서 경와공 박등(15), 우천공 박장춘(16), 옥간공 박무선(17), 가선대부 박용(18)을 제향하고 있다2017년, 가음면 현리의 함양박씨 문중은 약 160여 명이며 선생이 춘산 옹천재에서 학문을 닦았기에 그 해에 공식적인 파조를옹천파로 결정하였다.
 
광복 이후 선생이 창고가 있는 마을인 속칭 창마을, 즉 선생의 태생지(가음면 현리리 973-2)인 옥천사지에 유허비가 들어섰고 비문에 이곳이 옥천사 옛터라고 적혀 있다. 학문을 강론하던 터인 선생이 묻힌 마을이 굽어 보이는 곳 언덕배기에는 천운대(天雲臺)라 표해 둔 곳에 3칸 정자경천정을 세우게 되었다.
 


찾아 가는 길
유허비: 의성군 가음면 금성현서로 505
옥천사(옹천재): 의성군 가음면 금성현서로 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