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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사재 이탁영
정만록(征蠻錄)의 저자 효사재(孝思齋) 이탁영(李擢英)
내용
정만록(征蠻錄)의 저자 효사재(孝思齋) 이탁영(李擢英)
<충효당>
<정만록>
<이탁영 묘소>
의성읍 상리리 忠孝祠 입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孝思齋李擢英先生事蹟碑'가 서 있다.
'옛부터 국가가 危難에 처하였을 때는 忠孝義烈의 붉은 피가 성스러운 民族魂의 등불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글과 훌륭한 文章으로 시대사를 소상히.....‘
이탁영(孝思齋 李擢英)의 본관은 경주이며 1541년(중종36년) 당시 의성현 북부면 지곡리(현 충효사 터)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는 건(建)이며 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연년(延年), 어머니는 김철손의 딸 분성김씨(盆城金氏)이다. 선생의 나이 17세 때 아버지가 타향에서 객사하자 그 관을 정성껏 모셔 수백 리 길을 반장 (返葬 :객지에서 죽은 이의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 한 뒤로는 홀어머니를 하루같이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또한 홀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끝내고'언젠가 내가 죽거든 부모님을 보살펴야 하니 내 무덤은 부모님 묘소를 양팔로 감싸듯이 안고 있는 형상으로 묻어 달라'는 유언대로 현재 의성읍 중리리 (일명 여시개) 묘소의 형태가 포근히 감싸 안듯이 특이하게 자리잡고 있다.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수(金睟)의 막하로 들어가 참모로 활동했으며, 1593년에는 초유사(招諭使)학봉 김성일과 같이 체찰사(體察使) 서애 유성룡에게 여러 전술을 건의하여 의병을 모집, 군량미 조달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후일 그 공을 치하하여 숙종 때에는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의 벼슬이 증직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벼슬자리를 버리고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고향에 내려와 일생을 보냈으니 호가 반계(盤溪)임에도 당시 의성 사람들은 뒤에 '효사재(孝思齋)'라 불렀던 이유, 당호에 忠孝堂과 孝思堂의 편액이 걸리게 된 까닭도 40여 년간 오직 忠과 孝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 忠孝祠의 忠孝堂 편액과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孤雲寺 雨花樓 전각에 걸려있는 '孤雲寺' 편액은 선생의 13세 손 李銖哲이 썼다.
忠孝祠 경내에는 현재 兩全門, 忠孝堂, 孝思堂, 典祀廳, 忠孝門, 永慕泉 등의 전각들이 토석담으로 둘러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永慕泉은 선생이 노모를 위해 양어지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선생은 평소 문장력이 뛰어나 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임란 중에 자성기 30여 권과 기타 소장한 서책 등은 잃어버렸고, 나머지 저작물도 긴 세월과 여러 차례의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지만 정만록(征蠻錄) 2책만은 남아 있다.
임진왜란 4대 기록물인 서애 류성룡의 懲毖錄, 충무공 이순신의 亂中日記, 약포 정탁의 龍蛇日記와 함께 국보급 기록물인 보물 제880호 정만록(征蠻錄)의 내용은 무엇인가 알아보자.
정만록(征蠻錄)의 주된 내용에는 아군의 병력 배치를 비롯, 7년간의 전란일기, 국내 장병들의 전적, 국내 사정 및 수륙전 승패 현황, 일본지역의 상세도와 그들이 쳐들어온 경위, 조보(朝報)와 왕세자의 교유서(敎諭書) 등 조야관민의 사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 받는다. 1책 건권(乾卷)은 ‘임진변생후일록’(壬辰變生後日錄)이라는 제하에 월일별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점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임진년(壬辰年) 기사는 매일 기록하였고, 2책 곤권(坤卷)은 서문에서 임진왜란의 개황과 일록(日錄) 및 연혁 ·통문(通文) 등을 기록하거나 등서(騰書)하게 된 연유를 자세히 적고, 7년 동안에 있었던 교서·장계·통문·첩보·격문(檄文) 등을 고스란히 전재하였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시작된 날로부터 그 해 연말까지 약 10일간 기록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완전하게 적고 있다. 더불어 ‘征蠻錄’이 선조 임금이 명하였다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더해지며 현재는 원고본 1질만이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 찾아 가는 길
충효사: 의성군 의성읍 충효로 20
이탁영 묘소: 의성군 의성읍 성조길 산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