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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신원록

회당 신원록
노모를 위해 연친곡(宴親曲)을 지은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내용

노모를 위해 연친곡(宴親曲)을 지은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신원록 정려비>                                                  <신원록 불천위 사당> 


<회당집 묘도>
   
신원록(申元祿:1516~1576)의 본관은 아주(鵝洲)이며 자는 계수(季綏), 호는 회당(悔堂)으로 1516(중종11) 12월 의성읍 도동리에서 참봉(參奉)을 지낸 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5남 중 3남으로 형은 석록(錫祿), 택록(宅祿)이며 동생은 도수(道洙), 헌록(憲祿)이다. 고려 말 안렴사(安廉使)를 지냈고 효자로도 이름 높았던 퇴재(退齋) 신우(申祐)6세손이 된다효행으로 본보기를 실천한 분으로 손꼽히며 어릴 때부터 효행이 남달랐다 한다. 11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7년 연상인 형 원복(元福)과 교대로 문약을 구하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닌 끝에 팔공산까지 수 백리 길을 오가며 약을 구해다 손수 달여 드리면서 정성을 다한 일화도 있다부친의 병간호를 무려 8여 년 동안 옷끈을 늦추지 않을 만큼 정성껏 시중을 들였지만 끝내 돌아가시자 팔성리 산에 안치하고 묘 옆에 여막을 지어 3년 동안이나 곡루(穀樓)를 끊지 않아 소연(小連)이란 칭호를 얻었는데, 소연은 주대(周代)에 거상(居喪:부모의 을 당하였을 때의 일)을 잘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부친의 시묘살이가 끝난 후에는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했고, 명절이 다가오면 색동옷을 입고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리고 친히 연친곡(宴親曲) 8수를 지어 불러 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선생이 색동옷을 입고 재롱부린 것은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사람 노래자(老萊子)와 같은 효행이라고 하며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수 년 동안 지극 정성으로 홀어머니를 봉양한 지 90세가 되던 해 노환으로 병석에 눕자 대변을 맛보면서까지 간호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모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집안 식구들을 불러
장차 내가 죽거든 어머니의 영정을 내 관 속에 넣어 다오.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저승에 가 서라도 해야겠다.”
라고 거듭 되풀이하여 당부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일찍이 남명 조식에게 학문을 배우고 또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했다. 주세붕 선생이 돌아가시자 마음으로 3년 상을 치루기도 하고, 만년에는 도산서원을 드나들며 학문 연마와 진흥에도 이바지했다. 또한 퇴계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때 백운동 서원에서 머물면서 구봉령, 조목, 김필원과 교유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고 한다이에 선생의 열성적인 학구열로 보는 일면에는 의성에 서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당시 장천 (長川)이라 불린 팔성리 남대천 부근에 모재 김안국(金安國)에게 곡식 80섬과 소학 10질을 지원받아 의성읍에서는 처음으로 1568(선조1)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세웠던 것이다.
 
1576년에는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0년 후손 신열도와 학동 이광준과 유림들의 열의로 춘산면 빙계리 옛 빙산사지 터에 빙계서원(氷溪書院)이라 현액하였으나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2006년에 빙계계곡 초입에 복원하여 현재 모재 김안국, 회재 이언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여헌 장현광, 학동 이광준 여섯 분을 배향하고 있다아주 신씨(鵝洲 申氏) 가문에서는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들이 많은데 그 중 선생의 저서 <회당집(悔堂集)> 끝부분에 특이하게 무덤의 위치를 새긴 지도판인 분산도판(墳山圖板)이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분산도, 일명묘도(墓圖)’라고 하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을 그린 경우가 많은데 이는 명당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게 햐였다. 장풍득수(藏風得水)라 하여 바람이 모이고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야 하며, 뒤에는 주산(主山)이라 하여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안산(案山)이라 하여 낮은 산이 있어야 한다는데 묘도가 축소판 그림지도라 하겠다.
이에 문집을 수록한 후손들은
많은 세월이 흘러 조상의 무덤을 찾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을 때 문집 뒷부분의 묘도를 베껴서 묘소를 찾으라.”
고 묘도를 싣게 된 연유를 밝혔다. 묘도가 가리키는 곳은 현재 경북 의성군 비안면 고도산을 가리킨다.
 
선생은 157660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뒤 1615(광해군 7)에 조정에까지 효행이 전해져 그가 살던 마을 앞에 효자문이 세워졌고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의 벼슬에 증직되었다. 슬하에는 2남 심()과 흘()이 있고 흘의 아들 적도, 달도, 열도 삼형제가 단구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형 원복은 의성 사곡 매강서원(梅岡書院)에 배향되어 있다선생의 행적은 속 삼강록(續 三綱錄)에 기록되어 전하며 저서 <회당집(悔堂集)>이 있고 봉양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송은 김광수 선생과 오봉 신지제, 경정 이민성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찾아 가는 길
신원록 정려각: 의성군 의성읍 원흥226
신원록 부조위 사당: 의성군 의성읍 팔성안길 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