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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사공 김용비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
내용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
<진민사 유지비>
<사원지> <사경당에서 본 오토재>
첨사공 김용비(詹事公 金龍庇)는 고려 명종 조 인물로 의성김씨 시조인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석(錫)의 후손이다. 김석은 고려 초 의성군에 봉해졌으며 8세손 김공우 대부터 크게 번성하여 장자인 김용비는 태자첨사를, 차자 김용필은 수사공, 막내 김용주는 평장사를 지냈으며 장자 김용비는 의성김씨 중시조가 된다. 선생의 생몰연대나 행적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지만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1212~1300)의 증손녀가 김용비(金龍庇)의 증손부이므로 선생의 생몰이 아마도 김방경(金方慶)이 생존한 후반 시기로 본다.
선생은 공민왕이 당시 복주(현 안동)로 몽진 왔을 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오자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 무리들을 진압하여 지역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를 감사하게 여긴 지역민들은 선생 사후 300여 년간 은혜를 잊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을 모아 ‘진민사(鎭民祠)’사당을 세우고 제향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훗날 선생의 위패를 안치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재실인 오토재 향사에는 후손들이 헌관이 되어 제향을 드리지만 ‘진민사(鎭民祠)’향사만은 특별히 헌관을 종손으로 하지 않고 지역유지로 했다고 한다. 선생은 여러 차례의 국난에 공을 세워 이등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태자첨사의성군(高麗金紫光祿大夫太子詹事義城君)에 봉해졌다.
선생의 묘가 있는 지형은 풍수지리상 중턱에 위치한 괘등혈이라 알려져 있고,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보는 이도 있는데 동북쪽 마을의 베틀바위가 옥녀의 베틀이 되고 묘자리가 등잔이 되어 그 동네는 선암마을(치선리)이라 부르며, 등불은 옥녀가 밤낮으로 베를 짜는데 도움을 준다고도 한다. 비단옷은 높은 벼슬아치들이 입는 옷이니 높은 관직의 인물이 난다고들 한다. 또한 선생의 묘가 있는 오토산의 지명유래는 청,적,황백,흑의 다섯가지 색깔의 흙이 나왔다고 전해지며 그 중 선생의 묘는 조안산(朝案山)이 수려한 곳으로 신라 아찬 유삼재의 묘, 조선 대제학 박시용의 묘, 윤관 묘 등과 함께 전국의 유명 풍수가들이 찾는 곳 중 하나이다. 오토재에는 지금도 밤에 항상 두 개의 장명등(長明燈)을 환하게 켜 놓는다.
오토재 경내에는 진민사(鎭民祠), 사경당(思敬堂), 전사청(典祀廳), 숭덕문(崇德門), 진선문(進善門), 신도비각(神道婢閣), 사원지(思源池)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전 선생의 묘는 실전(失傳)되었는데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부친인 청계 김진(金瑨1500~1580)대에 이르러 되찾았다고 전해지며, 후손인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조선 1517년(중종 12) 경상도 관찰사로 의성에 들러 민정을 살피던 중 사당을 발견하고 진민사(鎭民祠) 편액을 내렸다.
선생의 묘비를 지은 후손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은 비문의 첫머리에
“우리 시조는 고려 태자첨사 용비”
라고 적고 있음도 후손으로서 물론 가문의 자랑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토재 입구의 사원지(思源池) 빗돌에는 '음수사원(飮水思源)’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을 줄여 말한 것으로,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도 그 물의 원천을 생각하고,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해 감사하며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음수지원(飮水知源) 이라고도 한다.
문화재청은 2017년 1월 3일 ‘의성진민사소장고문서’를 문화재자료로 지정했다. 의성김씨 오토재 종중과 지역민이 진민사를 설립해 현재까지 제향하고 있는 133점 일괄 관련 문서들을 말하는데, 이는 조선 중기~근 현대까지 작성된 것으로 내용상 가장 이른 것은 16세기 후반의 기록이다. 특히 시기적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진 한 문중에서 장기간에 걸쳐 향사와 문중 관련 문서를 수장해 온 기록문화유산으로서의 큰 의미가 있다.
※ 찾아 가는 길
㉠ 진민사유지비: 의성군 의성읍 문소2길 40-1
㉡ 오토재: 의성군 사곡면 치선오상길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