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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우(申 祐)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 무신이자 효자
내용
고려 후기 의성 출신의 무신이자 효자, 신 우申 祐
신 우(申 祐)의 본관은 아주(鵝洲), 호는 퇴재(退齋)로 아버지는 아주 신씨(鵝洲 申氏) 의성 입향조인 신윤유(申允濡) 이다. 출사하였을 적에는 조금도 직분을 수행함에 소홀함이 없었고 려말(麗末) 극도의 관료 부패시대에 불의를 쫓는 무리들과의 뜻이 맞지 않아서 스스로 물러나 버린 일도 있었다. 고려조 말엽, 전라도 안렴사를 역임하였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여 형조판서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씨 조선이 개국하고 연달아 소명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거절을 하고 노령의 어버이만을 섬겨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구천면 청산리에 장사 지내고 3년을 하루같이 시묘하였다. 상이 끝나자 묘 전에는 쌍죽이 돋아 났기로 유명하다. 공의 행실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과 삼강행실록에 등재 되었고 정려가 되었는데 공이 살던 마을을 효자리(孝子理)라 하였다.
이 마을에서 공의 8세손 흥효(興孝)가 태어났고 어버이에게 몸과 마음도 지극한 효자였는데 친환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2년간 연명을 하게 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에는 꿩이 날아들어와서 뒹구는 기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찾아가는 길
용포재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