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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양(朴成陽)
조선 전기 의성 출신의 무신
내용
조선 전기 의성출신의 무신, 박성양朴成陽
박성양(朴成陽, ?~?)은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도학이 높고 충절이 뛰어나 남쪽 왜구와 북쪽 오랑캐를 평정해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왕자 속함의 후예로 그 학문의 조예가 남달리 뛰어 났다고 한다.
고려가 기울어지자 향리인 봉양면 봉두산 선영 밑에 은거하여 거문고를 타고 글읽기로 세월을 보내며 도를 즐기는 한편 후진을 양성, 이 태조가 영재임을 알고 여러번 불렀으나 세상에 뜻이 없었던 공은 이에 응하지 않아 세칭 28은 가운데 한분이란 일컬음을 받아왔다.
그의 호 '금은'도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금서로만 즐긴 데서 자호 한 것이다. 그러나 1397년(태조6년) 을축 5월에 왜구들이 선주에 침입해오자 조야의 공론이 "문무를 두루 갖춘 공이 아니면 이를 토벌할 인물이 없다." 하고 원수로 천거하매 평소 학문과 무예를 익혀 온 자신이 나가지 않으면 남쪽 백성들을 구할 길이 없음을 알고 오직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한다는 대의명분으로 왕명을 받들어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용약 남하, 부산포에 닿아 적과 대치 60일만에 북치고 전진하며 대첩,남변 난을 평정했다. 개선길에 영천을 지나다 유방선이 여러 선비를 거느리고 향교에 모여 공의 승첩을 환영하면서 '향교요'를 증시 치하였다. 환도하여 복명하니 왕이 크게 칭찬 '석자칼로써 나라를 편히 하고 한 가닥 채찍으로 세상을 평온케 했다.'란 글을 내리고 "나를위해 늘 걱정되는 남변을 한 해만 더 지키라"는 유지가 있어 선비로 나라 중임을 감당키 어려우니 다른 임무로 바꿔 달라고 사양타가 결국 경상 좌영 병마절제사가 되었다. 1년간 남쪽을 지키니 감히 왜구가 다기 넘보지 못했고 임기를 끝낸뒤 왕명에 의해 보덕좌우장사로 일시 서울 서대문밖 근동의 한적한 곳에 옮겨 지내게 되었다.
태종이 즉위(1400년 경진)하자 공은 전라도 안렴사로 가게되어 그 곳에서도 선정을 펴니 도민들이 우러러 칭송, 그 송덕비에 '백성을 다스림에 문교 숭상해 선향 이뤘네. 날과 달로 학문 가르쳐 유학 기풍 크게 떨쳤다.'라고 했다. 이어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함길도 북영 병마사(절제사)로 전임되어 임지로 떠나려던 차에 부인 동래 정씨를 잃었다.
북영에 도임해서는 비록 적이 포로라 할지라도 신의로 대해 주니 그들이 마음속으로 깊이 느껴 충심으로 복종해 옴으로써 마침내 병기를 거두고 적에 대한 걱정을 안해도 좋게 되어 그 곳 주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며 학문마저 닦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419년(세종 원년) 기해에 왜구들이 남쪽 비인현에 쳐들어와 노략질하므로 왕이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절제사로, 공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토벌케 하니 그해 6월에 병선과 군사 17,285명을 거느리고 거제도 두지포에 정박, 왜적들이 그의 위풍만 멀리서 바라보고도 겁을 먹어 벌벌 떨며 놀라 도망쳐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우군을 지휘하여 무찔렀다.
곧 우군동지총제로 특별 제수되어 개선해 돌아와선 다시 가선 대부 이조참판 겸 도총부 부총관에 승진, 나라가 평온을 되찾자 왕이 더 내리려는 상훈을 기어이 마다하고는 고향(현 봉양면 분토동)으로 내려와 후진들을 가르치며 도락(道樂)했다. 그의 학문 깊고 의리에 맞게 처세했던 덕이라고 "학문은 천인을 관통하고 공훈은 사직 보존했다. "(이언적), "문무 전재(全才) 있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4조 섬겼다. "(문소지 라고 칭찬, "한양에 도읍 정한 뒤 의정부와 각조의 액필 편기(額筆扁記)는 모두 박성양의 손으로 쓴것이라. "(서거정) 하여 그 글씨 솜씨까지 추켰다.
공이 간지 4백년만인 1868년(고종 5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성균관 제주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증직되고 시호는 정헌이라 하였다. 그의 묘는 봉양면 분토리 선영 하에 있고 가음면 양지동에 있는 명곡서원에서 제향되고 있다.
찾아가는 길
명곡서원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금성현서로 553-9[양지리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