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규(張是奎)
내용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무신, 장시규張是奎
장시규(張是奎)(1627-1708)는 이름 높은 달산군 장보지(張輔之)와 국천효자 장지단(張之端)의 후예로 1627년(인조5 정묘)5월 7일에 태어났다. 1648년(인조26 무자)에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하여 22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자현대부 삼도수군통어사, 양주목사를 마지막으로 30여년간의 긴 출사길을 버리고 56세 때 고향에 돌아왔다.
그가 지나온 화려한 관로에는 허다한 노고와 공적이 있었으나 다 기록하기 어렵고 효종 때 선전관을 출발로 현산, 춘천, 태안, 회령, 양주 등지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성력을 다해 다스렸다고 한다. 익산, 나주, 충주 등지에서는 토포의 중임을 띠고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북변수비와 경기, 황해, 경상좌도의 수군 절도사를 거치고 교동도호부사와 삼도 수군통어사 시절에는 국토보위의 막중대임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충의와 청빈으로 일관하여 오던 그에겐 고향의 전원생활에 낙을 붙이고 지내면서도 나랏일을 한시도 잊을 날이 없었다.
회혼과 회방을 지내니 드물게 보는 경사라 하였고, 82세의 장수를 누리고 떠나니 때는 1708년(숙종34년)12월3일이었다. 국왕은 예관을 보내어 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사제문 치제 하였다.
이듬해 봄 지금의 안계면 도덕리 화경산(花頭山) 남쪽의 진성이씨(眞城李氏) 부인의 묘에 합장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 달리고 활쏘며 조련하던 안계 벌이 내다보이는 자리이다.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에 있는 경덕사(景德祠)에 아들인 장한상(張漢相)과 같이 봉향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
경덕사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용사리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