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문국의 역사
내용
조문국의 존립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 "는 한 조항뿐이다. 이 벌했다는 말을 지리지, 읍지 등에서 "멸(절)했다", "취했다", "진했다" 등으 로 해석하여 마치 이때에 조문국이 멸망한 것으로 표현하여 오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벌"자를 어떤 뜻으로 사용했는지 그 쓰임새를 살펴보자 신라본기에, 나해왕 19년(214) 7월에 백제를 벌했 고, 무렬왕 6년(659) 4월에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벌했고, 5월에도 백제를 벌했다 하였는데 백제는"문무왕 3년 (663)에 멸망했다. 파사왕 29년(108) 5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비지국, 다벌국, 초팔국을 벌하고 병합했다.
또 고구려 본기에서, 대무신왕 27년(44) 9월에 한나라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파병하여 낙양을 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 현으로 만들었다 하여 벌을 멸망시켰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여암전서 강계고에서도 "조문국은 삼국사기 한 곳에 벌했다는 글에 불과하므로 언제 신라에 종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 하였다.
조문국이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조문국의 도읍지 주변인 금성면과 봉양면 일대에 지석묘와 금성면 탑리, 대리, 학미리에 수 많은 고분군이 산재한다. 삼한시대 부족국가들의 형성시기를 서력 기원 전후로 본다면 지석묘는 선주 민의 것으로 볼 수 있고, 196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탑리리 고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많은 토기, 철제등 자 등 유물이 나왔는데, 신라토기 편년 전기(350∼450)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의성군문화유적지표 조사보고, p.79) 이 가 운데 금동관은 조문국의 왕관으로 보인다. 6세기에 들어와서 신라 지증왕 15년(514) 1월에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했는데 이 아시촌을 지금의 안계지방으로 추정한다. 이곳이 당시 아시혜현이기 때문이다.
법흥왕 12년(525) 2월에는 지금의 상주시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였다. 이즈음 신라가 의성 주변의 통치권을 강화한 것 을 보면 이때 조문국은 이미 멸망한 뒤가 된다. 고분의 출토유물의 제작연대와 주변 정세를 감안하면 조문국은 5세기 말경 에 멸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