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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정민
제목 [경북 예천] “태평의 샘이여 솟아라” (1)
작성일 2013-11-23 18:02
조회수 468
 
▲ 경북 예천 회룡포(사진=최성애 기자)

[글마루=김지윤 기자] 예부터 중국에선 태평한 때에 달달한 물이 솟아오른단다. ‘안녕(安寧)’을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우리나라 한 고장의 이름도 ‘단술 례(醴)’에 ‘샘 천(泉)’, 예천이다. 그리고 이름 덕분에 예천의 물이 좋다는 입소문이 자자하다. 물이 좋으니 이곳에서 나는 과실 또한 우수하다. 열매를 맺는 한가을을 앞두고 찾은 예천에서 과실(果實)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집약한 역사적 결실을 보았다.
9월 초, 황금색으로 물들기 직전이다. 가을볕을 받은 논은 고향을 찾은 듯한 포근한 느낌을 준다. 북동쪽으로는 소백산 줄기가 예천을 감싸고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른다. 그야말로 배산임수 지형이다. 어머니 품과 같은 아늑한 감(感)을 주는 경상북도 예천이다.

서울시 면적보다 약 50㎢ 더 넓은 예천(660.8㎢)이지만 4만 6천여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한적한 마을이다. 하지만 불과 500여 년 전, 학문의 중심지인 안동의 영향으로 예천 역시 문자의 향을 피웠다. 금곡서원을 비롯해 노봉서원, 도정서원, 소천서원, 신천서원, 옥천서원 등 나열한 서원만 보더라도 많은 학자와 선비가 예천에서 학문을 닦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초간 권문해(1534∼1591)가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의 목판 역시 예천이 학문의 고장이었음을 알린다.

배움의 환경으로도 완벽한 배산임수 지형이다. 하지만 인문학의 장(場)으로만 생각하면 섭섭하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만들어낸 작품 회룡포로도 많은 이의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 회룡포로 들어가기 위해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사진=최성애 기자)

물과 시간의 작품 회룡포

경북 예천을 소개하는 책자들엔 큼지막하게 회룡포 사진이 놓였다. 회룡포는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내성천의 힘으로 만들어진 마을이다. 마을 앞산인 비룡산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물돌이 마을을 내려다보면 왼편으로 아슬아슬하게 육지와 회룡포가 이어졌다.

내려다보는 기준으로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내성천이 빠른 속도로 흐르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시 왼편으로 흐르다 빠져나간다. 350도로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셈이다. 나머지 10도마저 물이 둘렀더라면 육지와 철저히 분리된 섬이 됐을 것이다.

예부터 오지 중의 오지로 알려진 회룡포는 한때 죄인들의 임시 귀양지였으며, 6·25전쟁 때엔 피난처이기도 했다. 원래 이름은 의성포였으나 경북 의성군엘 가 의성포를 찾는 이가 많아 군에서 ‘회룡포’라고 이름을 붙였다. 마을로 들어가려면 공사용 철판을 이어붙인 다리, ‘뿅뿅다리’를 건너야 한다. 원래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물을 건넜으나 20여 년 전 생긴 뿅뿅다리로 여유를 만끽하며 왕래할 수 있다.

금당실마을서 우리네 자긍심을 찾다

배산임수인 예천에서도 명당 중의 명당은 금당실마을이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으로 정하려 하기까지 했으니 금당실마을이 명당자리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또한 <정감록>엔 예천을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라 했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도 전쟁(임진왜란)이나 홍수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도 피해갔다. 참으로 신기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왜군에겐 이 마을이 정말로 보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오지 중의 오지’로 보고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일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외부의 손을 덜 타서인지 마을엔 초간정, 예천 권씨 초간종택 등 고택이 잘 보존됐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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