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금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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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다시 ' 부산행'에 대해서 |
작성일 | 2016-09-05 20:41 |
조회수 | 441 |
얼마 전 안동까지 가서 우리 회원들과 함께 본 ‘부산행’이 1100만을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이것만으로도 아! 싶은데 ‘터널’도 벌써 650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뉴스를 보고 있자니 영화란 원래 있지도 않은 일을 다룬 허구 아닌가 그런데 이토록 관객들의 지지를 받는 다는 것이 처음엔 흥미롭게 여겨지다가 왠지 씁쓸한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어째서 이 시점에 재난을 다룬 두 영화가 이토록 우리들의 눈길을 끌며 발길을 극장가로 모여들게 하고 있는가. 있지도 않은 허구의 재난이야기가 어떤 현실보다 현실처럼 보인다는 것, 이것은 분명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착잡한 우리의 자화상을 보아야 하는 것이 영 불편하고 힘이 든다. 우리가 저토록 일그러지고 뒤틀린 사이코패스이고, 좀비이고 이기적이라고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니 참 좀 과장되게 들릴지 몰라도 저절로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프랑수아 틔루포라는 유명한 영화감독이 흥행에 성공한 영화에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존재하지 않는 좀비와 ‘하도 터널’이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절대 허황하지만은 않음은 그들과 어느 면에선가 우리는 서로를 교감하고 있음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사고는 영화에서는 감염자와 비감염자로 나누어진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다시 읽으면서 그 이야기 안의 인종차별과 이기적인 다양한 인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분법적인 우리의 현실을 다시 집어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이분법적으로 살고 있는지 아, 싶었다. 허기사 열차라는 게 차등있게 만들어진 구조인가. 지불하는 돈에 따라 신분계급처럼 차별되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가 특실, 일반실이 없이 그냥 노숙자도 부자도 함께 열차를 타는 세상이 언제 가능할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나의 생존을 이유로 나의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오직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오늘을 우리는 너무나 태연히 살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다보니 ‘부산행’은 끊임없이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염자와 비감염자. 착한 자와 악한 자, 죽어야 하는 자와 살아남아야 하는 자,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 마지막 희망이라고 중얼거리다가 가족이기주의 말이 떠올라 그 또한 조심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자는 것에 이르자 마지막 희망은 내가 좋아하는 부산이 마지막 출구가 되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보는 것이다. 덕혜옹주나 보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좀 울고 싶다. 눈물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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