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김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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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문화담방기>김제균 정효각을 다녀와서 |
작성일 | 2017-06-27 16:42 |
조회수 | 554 |
<문화탐방기>
김제균(金濟均) 정효각(㫌孝閣)을 다녀와서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송화길 47-3 金永東
< 탐방장소> :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송호 2리(沙阜)
나는 송화(松花)에 살면서 인근마을인 사부(沙阜)테에 효자각(孝子閣)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어느 분이 어느 때, 어떤 효행을 하셨는지를 자세히 알지를 못했다. 매년 벌초 때에는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그저 사진이나 찍고 돌아오곤 했다. 이제 조상의 뿌리를 찾고 조상의 빛난 얼을 찾아 자손들에게 전하고 실천하도록 가정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자세히 조사 해보기로 하였다. '다인'면은 본래 '다기' 혹은 '달기'였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땅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꿀 때 '多仁'이 되었다고 한다. 훌륭한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려고 애쓰게 된다. 마찬가지로, 좋은 의미의 이름을 가진 지역도 그에 걸맞게 발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沙阜는 동쪽으로는 독점 산, 문암산, 곤지 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빈틈없이 안사면과 경계선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579.3 m 비봉 산이 낙동강을 가로막고 있으니 태고(太古)의 신비(神秘)를 간직한 좌청룡(左靑龍)에는 대흥산(大興山)(사부테 마을 앞 정효각의 효자 봉와 김제균의 산소가 여기에 있다)이 둘여 쌓여 있고 우백호(右白虎)에는 천지봉(天地峰)의 주령(主嶺)이 쌓여있고 후면(後面)으로는 자미산(紫微山,비봉산)의 정기(精氣)를 이어받아 낙동강(洛東江)의 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으며, 견훤(甄萱 ?~936)이 다인 비봉 산에서 군사를 훈련을 시키고, 성을 쌓은 흔적도 있고, 지금도 비봉산 정상에는 왕건이 쌓았다는 성책의 흔적이 남아 있다. 비봉산(飛鳳山)을 동쪽에서 볼 때 봉(鳳)이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날아가는 듯 [비飛] 보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일설에는 일제강점기 때 왜놈들이 “봉(鳳)이 놀다가 날아갔다”는 것으로 산을 비하시킨 것이라는 말도 있다. 조선시대이름은 자미산(紫微山)이다. 외산 류시봉은 ‘락파 정기’에서 사호를 "비봉 산의 높은 것이 낮아져 평온해지고 뻗어가는 줄기가 머물러 깊고 그윽한 송호 마을을 이루니 요조 작 송호(窈窕作松湖) 감여가(堪輿家)들이 기운이 모여 터전을 이루었다" 고 하였다. 둥굴 재를 등지고 천자봉(天地峰)을 안산(案山)으로 하며 경사가 심한 비탈에 주택이 밀집하여 있으며 안동김씨의 400년 세거촌(世居村)으로 학문과 효덕을 숭상하는 마을이다. 사부(沙阜)테의 지질은 넓은 암반층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만 사암(砂巖)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강도가 약하고 푸석푸석하다. 모래와 참 돌에는 금맥(金脈)이 형성되어 햇빛이 비치면 반짝이는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이 마을에 금(金)이 있으니 김(金)이 찾아온 것이다. 김씨는 금이 나는 차돌에서 번성한다. 사부(沙阜)란 마을 이름은 ‘김씨가 크게 번성한다.’는 뜻으로 그 어원이 만들어진 곳이다. ‘사상(沙上)’이라는 지명은 김제균의 <봉와공 행적>에서 ‘공은 1796년 사상리(沙上里)에서 태어났다.(生于沙上里第)’ 하였고, 金龍漢 (1826~1891)은 <낙파 유고>에서 ‘사상팔경’을 읊으면서 ‘사상(沙上)’이라 하였다. 안동김씨 17世祖 휘(諱) 김언중(金彦中, 1594-1674)이 안평 박곡(博谷)에서 다인 사붓으로 옮겨 살게 되니 안동김씨 입향 조(入鄕祖)가 되었다. 입향 한 김언중의 산소는 금이 나는 차돌배이에 있다. 금이 나는 사부(沙阜)의 마을에 가장 존경스러운 효자가 태어났다. 정효각(㫌孝閣)은 조선 후기 의성 출신의 효자 김제균, 본관이 안동(安東). 자는 우여(禹如)이며. 호는 봉와(鳳窩)로. 통덕랑(通德郞) 휘근(輝根)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김병덕(金炳德)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이다. 김제균(金濟均)[1796~1849]은 안동김씨 25世祖로, 1796년(정조 20년―丙辰)7월 22일 송호2리(사부)에서 태어났다. 公은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길 줄 알아 칭찬을 들었다, 나아가고 물러남에 빨리하고 천천히 함을 가르치지 않아도 능히 할 줄 알았다. 부모의 명을 어김이 없었고 행실이 돈독하며 학문을 익혔다. 어버이의 공경함은 가르치지 않아도 천품으로 뛰어났다. 공(公)이 불과 15세에 부친상을 당했다. 아버지 김병덕(金炳德)이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법도에 넘치는지라 장례를 치르고 산소 곁을 떠나지 않고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곡을 하며 슬퍼하는 마음이 지나쳐 몸이 상할 정도였다. 온갖 방법으로 달랬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공의 작은 아버지가 억지로 달래어서 깊은 산중에서 몸을 상함은 비례(非禮)라고 설득하고,‘홀로 남은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불효요, 무서운 산골에서 산짐승에게 버리는 것은 어버이의 뜻을 저버리는 가장 큰 불효가 아니냐.’라고 말했으나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로부터 몇 해 후 홀로 남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병이 들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해 간병을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백약의 효험이 없었음을 크게 한탄하고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양친을 모두 잃었다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시묘를 하며 날마다 곡을 하였다. 3년 동안 울음이 그치지 않으니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깊은 산중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그를 위로하고자 찾아갔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묘막 앞에 가로누워 있어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튼 날 아침에 지난밤의 일을 소상히 이야기하니 ‘밤이 어두워서 호랑이와 돌을 분간치 못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이튿날 다시 찾아간 마을 사람들은 지난밤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어두운 밤이라서 바위를 잘못 본 것이 아니겠냐? 며 오히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았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의 성품과 행실에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효자 각은 사호(송호2리)앞 郡道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50m지점 왼편에 세워져 있다. 효(孝)는 백행의 근원이며 모든 사람이 행하여야 할 일인데 특이한 행실이 있으면 비석을 세워 현창하는 것이다. <예기 禮記>에 ‘조상의 선행이 있는데도 자손들이 알아 본받지 못함은 자손들이 현명치 못함이요, 알면서도 전하지 않음은 어질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였다. 윤리의 근본을 백세에 심었으나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며 효자 각을 세워 아름다운 풍속을 세우니 사람들의 뜻이로다. 공(公)은 헌종(憲宗) 22년(1849년) 5월에 고종(考終)하니 대흥산 임좌에 유포하였다. 김제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효자의 마음이 조정에 알려져 공이 태어난 사호 마을 앞에 지역 유림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하고는 1940년 4월 효자 포창지(褒彰誌)를 받아 정려되었고, 포창과 함께 효자 각을 세웠다. 광복 후 증손 만동(萬東)이 비각을 세웠다. 비각은 단칸(單間)규모의 우진각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2짝 철 대문을 달아 비각으로 출입케 하였다. 비각의 전면에는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는데, 비각 내에는 “孝子鳳窩金濟均之碑(효자 봉와 김제균지비)”라 각자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가구는 3량 가의 소로 수 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김제균 효자각(사부)이 2013년 12월 새로 단장한 모습이 보인다. 효행사실을 기록한 ‘봉와 공 행적’은 <낙파 유고> 집에 수록되어 있고, ‘정효각 상량문’은 김조현(金祖顯)이 지어 고사하였다. <봉와 공 실기>가 전한다. 만천(晩泉) 김조현(金祖顯)이 아래와 같이 상량문을 지어 고사하였다.
새<효자비안내문> 孝子 鳳窩 金濟均 行績
김제균(金濟均)의 자는 우여(寓如) 호는 봉와(鳳窩)요 세계(世系)는 안동(安東)태사(太師)휘(諱)선평(宣平)의 후손이며, 병진생(丙辰生)(1796년)이다. 본래 애친할 줄 알고 진퇴(進退)함과 유낙(唯諾)함을 가르치지 않아도 능히 할 줄 알았다. 15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법도(法道)에 넘치는 지라 장례를 치르매 산소 길을 떠나지 않고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호곡하여 숙부가 호유(互有)하되 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편모(偏母)를 누가 봉양하겠느냐? 너 또한 나이 어린데 깊은 산속, 짐승이 득실거리는 속에 노숙(露宿)한다면 효(孝)를 하려다 오히려 효를 상하게 하는 누(累)를 범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하여 강제로 반혼(返魂)케 하였다. 몇 해 뒤 모친의 병이 위독하여 약을 쓰고 갖은 정성을 기울였으나 마침내 별세하니 산소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 동안 시묘(侍墓)함에 마을사람들이, 깊은 산에서 외로움을 위로하고져 가는 데 큰 범(虎)이 길에 가로누워 사람들을 막는지라 사람이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튼 날 아침에 가서 간밤의 일을 소상히 이야기 하니, 말하기를, 밤이 어두워서 범(虎)과 바위를 분간치 못한 것이 아니냐고 하더라. 이는 사실을 숨기려는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감탄스럽다! 탁월한 행실로 윤리의 근본을 백세(百歲)에 심었으나 당시 표현하는 방법이 없어, 본사에서는 인쇄에 붙였고 마을로 하여금 표를 해서 미풍 세우게 하니 유림(儒林)의 뜻에 따름이라 이에 포창(褒彰)한다.
孔夫子 誕降 2491년 1940 庚辰 4월 儒林褒彰社 社長 參判 尹 0 求
(예기): 조상의 선행이 있는데도 후손들이 알아본 받지 못함은 자손들이 현명치 못 함이요, 알면서 전하지 않음은 어질지 못한 탓이다,“ 라고 하였다.
2013 년 12월 일 六世孫 有鎰
旌閭閣上樑 告辭 (정려각 상량 고사)
先王制禮 (선왕제례 ) 선왕이 예절을 만드니
以孝爲大 (이효위대) 효로서 으뜸을 삼은지라
百行之源 (백행지원) 일백 행동의 근원이요
五倫之首 (오륜지수) 오륜의 우두머리로다
無貴無賤 (무귀무천) 귀한이나 천한이 없이
報德鮮少 (보덕선소) 부모 은덕 갚는 이 적도다.
事生事死 (사생사사) 살아서 죽어서 섬기는 것이
其義一也 (기의일야) 그 뜻은 하나이다.
伏聞府君 (복문부군) 엎드려 듣자오니 부군은
幼能愛親 (유능애친)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사랑하니
骨相魁傑 (골상괴걸) 기골이 장대하고 호걸스러워
性度慈仁 (성도자인) 성품과 도량이 인자하였다
行年十五 (행년십오) 나이 열다섯에
失怙呼天 (실호호천) 아버지를 여의고 하늘을 보고 부르짖으셨다
哀毁踰節 (애훼유절) 슬퍼하고 슬퍼해 예절이 넘치어
便同成秊 (편동성년) 어른과 같이 하였다
纔到弱冠 (재도약관) 겨우 나이 스물에 이르러
又遭奈艱 (우조내간) 또 어머니를 잃으니
襄而廬墓 (양이려묘) 장례지내고 여묘를 지어
造次弗離 (조차불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도다.
風夜靡懈 (풍야미해) 이른 새벽과 늦은 밤에도 게으르지 않고
朝夕尊儀 (조석존의) 아침저녁 음식을 올리셨다
山君格矣 (산군격의) 호랑이가 가까이 지켜주었으며
鄕老稱之 (향노칭지) 고을 노인들이 칭찬하였다
子繼孫乘 (자계손승) 자식이 받들고 손자가 이어서
傳之有辭 (전지유사) 전해 온 말씀이 있어도
家世貧窶 (가세빈구) 집이 가난하고 구차하여
趁未籲營 (진미유영) 나아가 경영하지 못했도다.
力綿事鉅 (력면사거) 힘은 적고 일은 커서
有志無成 (유지무성) 뜻은 있어도 이룰 수 없는지라
幸蒙儒薦 (행몽유천) 다행이 유림의 천거로
社有褒彰 (사유포창) 집을 지어 표창을 받게 되도다.
高官巨筆 (고관거필) 높은 관원과 명필이
誌實稱情 (지실칭정) 실상을 기록하고 사정을 칭찬하시니
不肖興感 (불초흥감) 불초의 자식도 감정이 일어나니
俾也可忘 (비야가망) 어찌 가히 잊겠는가?
聲同氣合 (성동기합) 말도 모으고 기운도 합하여
欲伸微誠 (욕신미성) 작은 정성을 펴고져 하여
招工伐石 (초공벌석) 석공을 불러 돌을 다듬어
玆敢表旌 (자감표정) 이에 감히 기록하여 표하도다.
僅銘諱號 (근명휘호) 삼가 휘자와 호를 새기니
陰記未遑 (음기미황) 음기를 기록 할 여가가 없도다.
構之小閣 (구지소각) 작은 누각을 지어서
備彼雨暘 (비피우양) 저 비와 햇빛을 방비하였도다.
旣鞏基址 (기공기지) 이미 집터를 굳게 다지고
只設門墻 (지설문장) 문을 달고 담을 쌓았도다.
桷平柱直 (각평주직) 서까래는 수평 기둥은 곧아
規圓矩方 (규원구방) 둥근 규모에 사방 반듯하도다.
迺涓吉日 (내연길일) 이에 좋은 날을 받아서
恭擧修樑 (공거수량) 공손하게 대들보를 들어 올리니
桑痲前野 (상마전야) 앞들에는 뽕나무와 삼나무가 자라고
花樹舊居 (화수구거) 꽃과 나무가 오래 살던 곳이라
棲息之所 (서식지소) 생활하고 휴식하던 곳이요
出入之閭 (출입지려) 나가고 들어오던 집이로다.
伏惟尊靈 (복유존영) 엎드려 생각 하옵건데, 높으신 혼령은
庶幾降陟 (서기강척) 자유로이 오르고 내리시리라
在上洋洋 (재상양양) 위에 있어 훌륭하고 아름다워
神人以樂 (신인이악) 신령과 사람이 함께 즐기도다.
願庇雲仍 (원비운잉) 원컨대 구름같은 후손들 돌보시어
昭垂冥佑 (소수명우) 저승에서 도움을 주소서.
三綱是扶 (삼강시부) 삼강을 이에 붙들고
九族惇敍 (구족돈서) 구족을 화목하고 돈독하게 펼치도다.
各體其行 (각체기행) 각각 그 행동을 체험하여
無忝厥武 (무첨궐무) 그 허물을 더하지 말라
災害恒消 (재해항소) 재앙과 손해는 항상 사라지고
福履長至 (복리장지) 복과 록은 길이 오게 하라.
使此扁楣 (사차편미) 이 현판으로 하여금
愈久愈美 (유구유미) 더욱 아름답고 오래가게 하라.
嗟予本支 (차여본지) 슬프다 이에 본 손과 지손이
孰不追慕 (숙부추모) 누가 추모하지 않으리오.
潛德幽光 (잠덕유광) 잠겨 진 덕과 숨은 빛은
家庭傳寶 (가정전보) 가정에 전해 온 보배로다.
朝仰暮瞻 (조앙모첨) 아침저녁 우러러 뵈오니
典型如覩 (전형여도) 형상을 뵈옵는 듯하도다.
警咳雖遠 (경해수원) 깨우치고 기침하신 소리는 비록 멀어 졌으나
遺芳在此 (유방재차) 남은 향기는 여기 있도다.
棟梁維新 (동량유신) 기둥과 대들보를 새것으로 하니
永世勿墜 (영세물추) 이 세상 끝까지 헐어지지 말지어다.
傾頹遠憂 (경퇴원우) 기울고 무너지는 먼 훗날 근심은
嗣而釐補 (사이리보) 후손이 이어서 보수 할 것이다.
玆逑四言 (자구사언) 이에 넉자로 말을 지어
敢替六偉 (감체육위) 여섯 대목 상량문을 대신하노라.
齋沐百拜 (재목백배) 재개하고 목욕하여 백번 절하고
謹告虔告 (근고건고) 삼가 아뢰옵고 공경히 고하노라.
사부테의 정효각을 답사하고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여러 문헌을 조사한 결과 우리 의성이 효의 고장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 뿌듯하게 느끼면서 많은 교훈과 앞으로 각오를 다짐하면서 탐방을 마쳤다.
<의성문화원원고> 金永東 : 의성군 다인면 송화길47-3, 011-315-8358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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