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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성, 단밀, 금성의 지명 유래를 밝혔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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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최춘태 (182.224.115.27) |
작성날짜 | 2014-09-27 11:10 | 조회수 | 462 |
안녕하십니까? 의성 문화를 위해 헌신하시는 문화원장님과 직원 모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저는 고대국어 연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계명대학교에서 20년 동안 외래교수로 재직해 왔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세계적인 학자 세 분을 은사로 모셨습니다. 저의 박사학위 논문도 이 세 분의 영향이었습니다. 한 분은 목천 유창균 박사님이신데,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가 세계 한자 문화권 국가의 1인자들을 불러 모아 2년간의 한자 음운학 프로젝트를 시행하면서 유 박사님을 최고로 공인하였습니다. 지금 아흔 하나 연세로 살아계십니다. 또 한 분은 유창균 박사님과 학문의 경쟁자요 평생 친구이신 우정 박은용 박사님이신데, 세계 알타이어학의 대가이시며 세계적인 석학이 아니면 임용될 수 없는 일본 동경대 대학원 교수를 역임하셨습니다. 현지에서 만주어, 몽고어 사전을 편찬하면 반드시 한국의 박은용 박사에게 마지막 감수를 받습니다. 8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한 분은 들메 서재극 박사님이신데 난해한 신라 향가 해석학에서 독보적인 분이십니다. 2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 분의 학문을 사사한 덕택에 저는 세계 최초로 최소한 청동기 시대, 최대한 신석기 시대 한국어에 대한 논문을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왕 시기 15세기 우리말의 잔재를 가장 많이 지닌 방언이 제주 방언인데, 토박이 제주 방언은 우리가 들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600여 년 전의 언어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천 년 전의 신라어를 현대인이 듣는다면 지금의 대구 방언과 완전히 달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의 외국어 수준으로 들립니다. 이 고대자료를 해독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국내 현재 생존자로서 저를 포함해 세 사람 정도로 곱습니다.
신라 법흥왕 때 지명 개편을 시작하여 경덕왕 때 대대적인 지명 개편이 있었습니다. 이때 개편된 지명을 고려 때 김부식과 일연 선사가 사기, 유사에 각각 기록했는데, 이 두 사람도 신라, 백제, 고구려 때 왜 그런 지명을 썼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독을 후대에 맡기고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놓았던 것입니다. 의성에 지명에 대해 학계에서 미해결의 숙제로 남아 있다가 연구 끝에 이번에 제가 이 문제를 해독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원 홈페이지의 연혁이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맹이가 빠져 있고 사실과 달라 참으로 아쉽습니다. 고장이 변해온 이름은 알지만 그 뜻을 모른다는 점이고 그 이름의 유래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왜 召文國이며 聞韶國인지 또 이들과 義城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군민으로서 알아야 할 얼이요 정체성이라 사료됩니다.
義城은 [삼국사기 권34]에서는 전기 신라 때 召文, 후기 신라 때 聞韶, 고려 때 義城이라 기록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에서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單密이 왜 武冬彌知, 曷冬彌知인지 미해결의 숙제로 남아 있다가 저의 박사 논문에서 해독하였습니다. 金星면도 그 유래를 밝혔습니다. 이 사실을 의성군에 밝히고 강연 기회를 요청하였으나 담당자분께서 내년에 예산을 만들어 시행하겠다고 합니다. 그 전에 의성문화원에서 기회가 된다면 밝히고 싶습니다. 義城의 이표기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표기들을 어떻게 불렀는지, 또 그 뜻이 무엇인지를 그 전모를 밝혔습니다. 현재 문화원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문화원장님, 직원, 군민 여러분께서 이 이표기들의 의미를 아신다면, 잃어버린 내 고장의 정체성을 찾고 내 고장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강연 기회를 주신다면 문화원장님, 기관장님, 직원, 군민 여러분을 모시고 義城의 유래와 그 이표기에 대한 비밀을 모두 밝혀 義城의 뿌리를 밝혀드리겠습니다. 군민 여러분이 마땅히 그 유래를 알고 정체성을 찾도록 검토해 주시고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cct4986@naver.com)
연구실적(학술진흥재단 등록 연구물)
1. 중세문헌 연구(학술연구서) <요지> 이 책은 후기 중세국어(조선시대)문헌의 대표적인 자료들을 해독한 것이다. 여기에는 훈민정음언해, 용비어천가,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 두시언해를 실었다. 여기서는 어휘마다 형태소를 분석하였고 어려운 어휘와 음운현상도 빠짐없이 밝혔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분분하였던 문법현상들도 수정 제시하였다. 기존의 책들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였을 뿐 아니라 택하지 않았던 부분을 많이 다루었다.
이 책은 국어사를 연구하기 위한 초석이 되는 것이며 근대, 현대국어와 고대국어를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대국어의 영성한 자료로 인해 고대국어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연구 대상의 언어자료가 빈약하다면 그 앞선 시대나 그 다음 시대의 언어자료를 풍부히 활용함으로써 점차 앞선 시기 언어의 공백을 메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후기 중세국어의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전기 중세국어와 고대국어에 대한 전모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의 언어는 앞선 시기 언어 변화의 총체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 시대의 언어뿐만 아니라 당대의 잃어버린 문화와 사회, 지명, 인명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연구된 것이다.
2. 국어 음운의 통시적 연구(학술연구서) <요지> 이 책은 고대국어를 넘어 세계 최초로 상고 신석기 시대 우리말을 연구한 것이다. 신라시대의 언어와 현재의 언어 차이는 거의 외국어 수준의 차이를 보임으로써 당시의 말을 우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적어도 4천년에서 1만년 전의 우리말을 연구한 논고로서 상실된 고대 문화와 사회, 지명, 인명, 관직명 등을 밝히는 데 필수적인 책이다. 기초어 凸이 우리말의 음운변천에 따라 현대까지 이어온 것처럼, 상고시기의 기초어 口가 현재까지 변천해오면서 수많은 파생어를 낳았음을 밝혔고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어원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口는 자전에서 [입,구멍,소리]로 나타난다. 口는 상고시기에 [kɐt]으로 재구되면서 음절말 ㄷ의 ㄹ화로 []이 된다. [ㆍ]는 [ㅏ,ㅓ,ㅗ,ㅜ,ㅡ]로 분입되므로 우리말 [갈,걸,골,굴,글]에도 口의 의미인 [입,구멍, 소리]의 뜻이 있다면 설문해자의 口가 바로 우리말이며 그 주체는 우리 직계 조상임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매우 단편적인 예를 들면, [한글갈], [가로(>갈)되], 말이 [걸걸하다], 코를 [골다], 코를 [그리(>글)다]에서 口의 본래 의미가 학인된다. [갈,걸,골,굴,글]의 이전 형태인 [갇,걷,곧,굳,귿]은 적어도 신석기 시대에 쓰인 말이 된다. 이 말들이 현대어와 방언에 잔재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며 필자의 논고가 논증된다는 것이다. 제주 방언에 [갇다]는 ‘말하다’는 뜻이며 불어서 소리 내는 ‘고동’은 [곧+옹}으로 분석되어 여기서 온 말이다. 잠꼬대는 [잠+곧+애]로 분석되어 [곧]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최초로 청동기 시대, 신석기 시대의 우리말을 확인한 논고이다. 여기에는 최초의 청동기 시대 한국어에 관한 총 8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3. 고대국어의 음절구조와 유성저해음에 대한 연구(박사학위 논문) <요지> 이 연구는 고대국어의 음절구조와 유성 저해음에 대한 연구이다. 우리 고대국어가 현재의 일본어처럼 음절말 자음을 허용하지 못하는 개음절어였다는 가설을 토대로 이를 증명하였다. 증명의 기재로 분절음 연쇄제약을 이용하고, 고대문헌의 새로운 해석으로 고대국어가 개음절어였음을 증명하였다. 또, 개음절어의 특성인 저해음의 유성:무성이 우리 고대국어에도 있었음을 증명하였다. b/m, d/n, g/o의 교체를 기재로 하였으며 고대국어에서 이 교체가 직접 발견되었다. 또, ㅸ, ㅿ은 기존의 정설대로 v_v 환경에서 p, s가 유성음화된 것이 아니라 ㅸ은 고대국어 b에서 온 것임을 증명하였다. ㅿ의 존재도 학계에서는 최고 전기 중세국어인 고려 때를 한계로 잡았으나 이미 고대국어에 ㅿ이 존재했음을 문헌에서 최초로 확인한 논문이다.
4. 중세국어 서법소 {-거/어} 연구(석사학위 논문) <요지> 중세국어 서법소 {-거/어-}는 대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은 분야였다. 그 대표적인 연구가 이숭녕(가상법), 허웅(강조법), 고영근(확인법)이다. 그러나 제가들은 중세문헌에 한정한 연구로 이러한 오류를 범했으나 본 연구는 이두 문자부터의 통시적 연구를 통해 이 문제를 밝힐 수 있었다. 또, 제가들은 서법소 {-거-}의 어두 ㄱ이 탈락된 {-어-}를 시상소 {-어-}와 구분하지 못하여 더 혼선에 빠지게 되었다. 이 둘은 엄연히 별개의 문법소이며 시상소는 연철, 서법소는 분철로 표기됨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 쓰임도 다름을 밝혔다. 즉, 서법소는 [굴어니]로, 시상소는 [구러니]로 표기되었던 것이다. 또, 그 의미자질로 볼 때, 제가들의 견해는 모순이 많음으로써 본 연구에서는 새로 [인정법]이라 제시하였다.
5. /p/, /m/ 교체의 허실과 향가 執音乎에 대하여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 연구논문) <요지> 필자의 은사 중 한 분이신 서재극 박사께서 망울/방울, 미늘/비늘, 몽오리/봉오리, 마리/바리 등의 어두 p, m이 우리말에서 교체되며 분화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별적 어두 음소는 엄연히 다르며 분화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 교체는 고대국어 유성 저해음인 b, d, g가 무성음화되면서 p, t, k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b, d, g는 개음절 언어의 자음이 과도한 의미부담을 떠맡음으로써 m, n, o와 교체하였던 것이다. 결국 p, m의 교체가 아니라 고대국어 b와 m의 교체였던 것이다. 향가 執音乎는 기존 학자들이 [자브온]으로 해석하면서 音의 日을 口의 오기로까지 보았으나 광수공양가의 執音馬까지 우연히 일어난 오기로 볼 수는 없다. 현 개음절어 일본어가 그러한 것처럼 이는 b, m의 교체였음을 밝혔다. 이 b가 후에 p로 무성음화하면서 제가들이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6. 기초어 凸의 음운‧어형 변화 -[어]계를 중심으로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 연구논문) <요지> 필자의 은사 중 한 분이신 유창균 박사께서는 한자의 시초인 갑골문의 제작자, 즉 중국의 은나라 족속이 바로 우리의 직계 선조라고 추측하였다. 또, 서정범(1989)에서도 한자의 조어는 우리말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 두 대가들의 견해가 사실이라면 당시의 기초어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갑골문 제정 당시의 기초어인 凸이 우리말의 뿌리와 같아야 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凸의 상고음은 [diɐt]로 재구되며 ɐ[ㆍ]는 [ㅏ,ㅓ,ㅗ,ㅜ, ㅡ]로 분입되어 [닫, 덛, 돋, 둗, 듣]으로 변천하였으며, 이들의 변형인 [달, 덜, 돌, 둘, 들], [살, 설, 솔, 술, 슬], [잘, 절, 졸, 줄, 즐], [알, 얼, 올, 울, 을]에서 凸 의 기저 의미인 [높다, 불룩하다, 길다, 예리하다]는 뜻이 거의 모두에 나타남을 밝혔다. 상고 시기에 기초어 凸은 우리말이었음을 증명하였으며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어원을 무더기로 발견하였다. 이 연구가 마무리되면 중국사에 포함된 은나라 민족은 우리 직계 조상이 되며 세계사가 바뀌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난다. 언어가 같으면 족속이 같은 것이다. 이 논문은 청동기시대, 신석기 시대 한국어를 다룬 최초의 논고이다. 이 외에 신석기 시대의 언어를 다룬 미제출 논고 8편이 있다.
7. 국호 신라에 대한 연구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 연구논문) <요지> 현재 한자음대로 부르고 있는 新羅[silla-실라]는 자음동화가 일어난 발음이다. 그러나 국호 新羅가 제정될 당시에는 자음동화가 일어날 수 없는 개음절 언어였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新羅로 적었지만 읽기는 달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silla]는 본래의 국호가 아닌 것이다. 新의 훈은 [새롭다]는 의미의 [새]가 되고 그 변천은 [새<사ㅣ<살<<]임을 밝혔다. 新羅의 다른 이름인 鷄林, 金星, 東京, 東泉의 鷄, 金, 東의 훈 혹은 소리가 모두 [새]가 되고 林, 星, 京, 泉은 모두 *버르(>벌)로 읽혔음을 밝혔다. 한자의 음독과 석독의 차이로 제가들이 오류를 범했던 것이며 당시의 표기법인 받쳐적기를 인식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車衣에 衣가 받치고 있는 것은 [차의]로 읽지 말고 [수릐]로 읽어 달라는 요청이다. 新羅의 羅를 받쳐 적은 것도 [신라]로 읽지 말고 밝음, 태양의 햇살을 뜻하는 []로 읽어 달라는 요청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新은 당시 []로도 읽혔던 것이다. []의 의미는 날이 새는 東의 뜻이며 羅는 퍼져나가다는 뜻이다. 즉, 新羅의 국호는 [신라]가 아니라 []였으며 그 뜻은 [빛이 온누리에 퍼지다]는 뜻이다. 한 국가의 국호는 그 정체성을 담고 있다. 당시의 발음과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라진 옛 지명을 반드시 찾아 그 마을의 유래를 알 때, 우리는 그 뿌리로 인한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8. 음절말 ㄹ·ㅅ 교체와 그 단어족·어원에 대하여 (학술진흥재단 등재 학술지 연구논문) <요지> 음절말 ㄹ·ㅅ의 교체 문제는 유창균, 박은용 두 대가의 궁금함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그 후 20여 년 동안 교체의 비밀이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ㄹ·ㅅ의 교체 배경은 상고국어 당시의 폐음절어가 개음절로 변하는 과정에서 음절말 ㄷ이 ㄹ이 되었고, 이 ㄹ은 개음절 화자에게 j와 s로 분파되어 발음되었다. j로 분파된 경우, [대구]는 달구벌의 [달구]가 음절말 ㄹ의 j화로 말미암아 [대구]로 된 것이다. [갈굴이]가 [개구리]로 변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에 비해 s로 분파된 경우는 [절이다(鹽)]는 [젓갈], [물,무리(衆)]가 접두어 [뭇-(별)]으로 변한 것과 같다. 경상방언 [절]은 [젓-(가락)]이며, [씨알]은 [씨앗], [풀(草)]은 접두어 [풋-(나물)]이 되었다. [불다(膨)]와 [붓다], [(선생)-질(爲)]과 [짓]은 그 뿌리가 각각 같다. 글(文)도 처음에는 [긋다(書)]에서 온 것이다. 신라향가에서 尸가 ㄹ가 ㅅ으로 겸하여 쓰였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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